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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우이동 주민자치회관 다문화 한국어교실 - 한국어 교실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가족 - “받았으니까 (돌려)줘야죠”…지역사회에서 다양한 봉사
  • 기사등록 2016-10-31 12: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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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갔던 날은 마침 펠린다씨의 생일 이었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를 때 촬영을 하자 펠린다씨는 우는 시늉을 하며 익살을 보여줬다.

우이동주민자치회관에서는 다문화 한국어교실을 운영중이다. 베트남, 중국, 캄보디아, 키르기스스탄, 필리핀 등 다양한 국적의 여성들이 많을 때는 15명 적을 때는 10명이 모여서 매주 목요일에 한국어 공부를 한다.


이곳에서 한국어 강사를 맞고 있는 신기자씨는 “이곳은 다문화센터에서 하는 한국어 교실과는 다르다”며 “언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체험 활동을 통해 문화도 함께 체득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언어를 매개로 모인 이들은 새로운 가족이 됐다고.


필자가 찾아갔을 때는 필리핀에서 온 펠린다씨의 생일(2016년 10월 18일)이었다. 우이동 한국어교실 7년차이며 초창기 멤버인 펠린다씨는 함께 공부하는 이들과 먹으려고 전날부터 다양한 음식을 준비했다고 한다. 족발을 삶은 후 튀긴 ‘크리스피 바타’, 필리핀 식 잡채, 치킨 아도보 등을 내놓았다. 생일 케이크 촛불을 끈 후 모여 앉아서 대화를 이어나가는 모습이었다.
주로 한국말을 썼고 같은 국적끼리는 그 나라 말을 썼다.


우이동주민자치회관 한국어 교실의 시작은 김치 만들기에서부터 시작했다. 우이동 일부 주민들이 한국에 와서 고생하는 다문화 여성들에게 김치 담그는 것을 말해주자에서 시작했다. 막상 모아보니 남편과 나이차이가 많고 소통이 안되는 사람, 한국말을 몰라서 의기소침해 있는 사람 등 한국어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강북다문화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 교실을 열게 됐다.


이곳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다문화 여성들은 밝아 보였다. 우선 주변에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같은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중국에서 온 쇼유조(33, 우이동)씨는 “처음에 왔을 때는 한국말도 잘 몰랐고, 주변에 친구도 없어서 외로웠다”며 “이 곳에서 한국말도 배우고 친구도 만나면서 관계를 넓혀갔더니 더 이상 외롭지 않았고 한국살이가 즐거워졌다”고 말했다. 그는 남편과의 관계도 한국말이 늘면서 대화가 통하니 더 좋아졌다고 덧붙였다. 쇼유조 씨는 바리스타 공부를 해서 요새는 커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다 한국어가 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굴잔(27, 삼각산동)씨는 “2년전 한국어 교실에 처음 왔는데 그때는 자음과 모음 그리고 안녕하세요 정도만 알고 있을 때였다”며 “오늘 운전면허 시험을 보러가는데 그 정도로 많이 알게됐다”라고 말했다. 그는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고 아이를 낳으면 직접 운전해서 여행이라도 가겠다고 말했다. 또 남편이 음주를 할 때 대리운전을 부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베트남에서 온 이승아(29, 우이동)씨는 “처음엔 자음과 모음 조차도 모르는 상태로 한국어를 시작했고, 배우면 배울수록 어렵다”라며 “한국어를 열심히 해서 직장을 다녀 가계에 보탬이 되야한다”고 전했다. 이 씨가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사고로 인해 뇌병변장애를 얻게 됐는데 생계를 꾸리려면 직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어를 모르면 직장을 구하는 데 장벽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다양한 이유로 한국어를 배우고 있지만 이들은 본인들이 모여서 친해졌듯이 지역주민과의 관계도 넓혀가고 있다. 지난 9월에는 추석음식을 만들어 지역내 독거노인에게 전달하기도 했으며 강북경찰서의 치안봉사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아울러 지역 축제 등에도 다문화 공연을 통해 주민들에게 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고 있다.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이유에는 이들은 입을 모아 “받았으니까 (돌려)줘야죠”라고 말했다. 동네에서 한글도 가르쳐주고 친구도 만들게 돼서 한국생활에 적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다는 것.


일부는 귀화를 해서 개명을 한 사람도 있었고, 아직 그만큼의 한국어 실력이 못 미친 사람도 있었다. 모두 앞으로 남은 여생을 한국에서 보낼 것이라고 한다. 가족이 보고 싶지만 서로 의지해가면서 살아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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