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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긋지 아니는고
우리도 그치지말아 만고상청 하리라.
우리가 학창시절부터 많이 보고 들어왔던 이황 퇴계선생님의 詩이다. 이 詩의 내용은 “청념하게 살라”는 뜻에서 나는 공직생활 내내 좌우명으로 삼고 가슴속에 묻어 놓았던 詩이다. 후일 이 詩를 시조창으로 불러 주요무형문화재41호 전수자의 길을 걸을 줄은 나 자신도 몰랐다.
◈ 시조창에 입문하다.
30대 초반시절 난 교회에서 대학생들을 데리고 사물놀이패를 만들어 단장을 맡았다. 이때부터 장고를 처음 손에 들게 되었고 장고의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남자 대학생들이 하나씩 군대를 가게 되면서 여학생 몇 명만 남게 되어 더 이상 사물놀이패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이후 마음속에는 장고를 더 배웠으면 하는 생각이 나를 사로 잡았다. 우연한 기회가 찾아 왔다. 경기민요 문화재 김금숙 선생을 만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장고를 직접 치면서 경기민요를 부르는 장면을 보고 “바로 이거다”라며 경기민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배움에 임하는 처음의 각오는 “부지런히 배워 연강홀에서 경기민요 발표회를 하겠다“는 것이 였으나 내가 3년여에 거친 경기민요 연습을 일단락 지은 계기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회심곡의 대가라 일컽는 김영임 선생이 교육문화회관에서 가진 발표회에 초청을 받았는데 회심곡을 부르기 앞선 맨트에서 ”제가 회심곡을 30년을 불렀는데 이제사 회심곡의 맛을 조금 알겠다“는 것이 였다. 3년 내기인 나는 꿈을 접고 경기민요을 취미로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민요를 같이 배우던 친구가 “진짜 좋은 노래가 있으니 배우러가자”는 제안을 받고 가서 테스트를 받고 시작한 것이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노래 정가의 한 장르인 “시조창”이였다.
정신없이 바쁜 하루의 업무를 마치고 부지런히 달려가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는 나에게 시조창을 전수해 주시는 주요무형문화재41호 이수자 만개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려운 시조창을 부르고 또 부르다 보면 어느덧 2~3시간은 덧없이 지나간다. “시조창은 1곡의 노래를 완성시키려면 곡당 2천번은 불러야 된다”며 끊임없이 반복시킨다. 이렇게 하다보면 10시나 훌쩍 넘어 집으로 향한다. 매일 이렇듯 반복되는 연습은 재미 보다는 지루함이 앞서기도 한다. 이렇듯 20년의 세월을 시조창과 함께 했다. 지루함과 끈기 부족 등의 이유로 그만 둘 법했을 텐데도 시조창의 매력은 나를 놓지 않았다.
◈ 전국시조가사경창대회 대회장에 역임하다
우리나라 8도에서 시조창을 배우는 문하생들이 몰려온다. 성남시청 대강당에서 열린 제27회 전국시조가사경창대회 대회장내에는 300여명의 회원들이 장내를 가득 채우고 있다. 공식적인 집계로는 대략 시조인구가 1천명이 넘는다고 하지만 전국대회에 참석하는 인원이 이정도면 시조인구는 고작 4~5백명선 되지 않을까 싶은게 내 생각이다. 이들이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인 정가의 맥을 이어가는 분들이라는 점에서 존경해 마지않는다.
문제는 이들이 거의 고령층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빠른 비트의 랩은 좋아해도 느림의 미학 정가에는 관심이 적기 때문이다.
대회가 시작되면 대회장은 대회사 외에도 개회식을 마친 후 이어 대회장의 시조창 시창이 진행된다. 대회장인 나는 정형시(3.4, 3.4, 3.5.4.3자)인 “청산은 어찌하여”를 한가락 뽑아낸다. 대회장의 시창이 마친 후에야 비로소 대회의 서막이 열리기 때문이다.
경창자들은 각자 준비한 곡을 열창한다. 심사에 의해 장원, 우수상, 장려상 등 각각의 평가를 받아 상금과 상장이 대회장 명의로 수여된다.
◈ 우리의 노래 시조창을 알리는 전도사로 나서다
서울시가 주최하는 “2014 북서울 꿈의 숲 전통문화 한마당” 행사가 북서울 꿈의 숲에서 개최되었다. 나는 강사로 선정되어 2일간 아침부터 저녁시간까지 강의에 맡았다.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 많은 학생, 어린이들이 부모님의 손을 잡고 강의실을 찾았다. 자라나는 어린학생들에게 우리나라 시조창을 알리는 것은 참으로 보람된 시간 이였다. 처음 들어보는 시조창은 아이들도 좋아했지만 학부모들이 더 좋아해 더욱 신이 나기도 했다.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회사에 친한 친구들과 함께 해외여행(성지순례)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우리가 간곳은 성경책에 나오는 ‘페트라’로서 요르단에 있는 요세이자 협곡이다. 입구에서 끝까지 걸어서 50분정도 걸리는 곳으로 입구는 좁고, 협곡 안은 엄청 넓다. 페트라의 안쪽 끝부분에 도착하니 돌을 깎아 만든 야외 음악당이 있었다. 일부는 전쟁으로 부서졌으나 대부분 원형 보존되어 있었다. 먼거리를 걸어 들어온 수백명의 여러나라 여행객이 야외음악당 그늘에 옹기종기 앉아서 쉬고 있었다. 우리 일행 중에 예술의 전당의 남성합창단원인 분이 있었는데 이곳에 도착하자 “동생 여기가 야외 음악당인데 우리가 그냥 갈수는 없지 않냐”며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 보았을 만한 노래 ‘아베마리아’를 한곡 뽑았다.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동생도 한곡하지!” 하는 소리에 난 시조창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청산은 어찌하여”를 뽑아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그들이 내가 부른 시조창의 가사를 못 알아 들을 텐데도 음률만을 듣고 전부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내왔다. 이뿐만 아니다, 무대에서 내려오자 현지 청년이 나에게 닥아와 “Great!” 하며 싸인을 해 달라는 것이 였다. “Republic of KOREA, 中 山”이라고 적어 주었다. 그랬더니 청년은 “협곡 안에서는 차량운행이 금지되어 환자나 비상시에 나귀를 태워 입구까지 데려다 주는 일을 하고 있다”며 “오늘 당신에게 입구까지 나귀를 태워다 주고 싶다”는 것이였다. 아마 이곳에서 노래 한곡하고 나귀를 타고 나온 경우는 내가 처음인 듯 싶다. 지난해 발칸반도 여행에서도 아카펠라 중창단 공연에 이어 시조창(남성지름 바람아)을 열창해 그 곳에 모인 외국인 관광객들이 “어느나라 사람”이냐며 관심을 보이면서 우리 일행을 졸졸 따라 다니는 등 시조창으로 국위선양하는 일이 종종 있어 보람을 느낀다.
또 한번은 내가 회사에 근무할 때다. 본청 대강당에서 재능기부 식으로 시조창 공연 요청이 있었다. 이미 우리 부서에서 장시간의 거친 시조창 강의를 한바 있어 쾌히 공연을 하기로 했다. 갓을 쓰고 오랜지색 두루마기를 입은 조선시대 사람의 옷차림으로 시조창 공연이 대강당에서 열릴 줄은 대강당을 가득 메운 직원들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며, 이런 우리의 가락을 대다수는 처음 접했을 것이다. 박수를 많이 받았다.
강의 요청은 쇄도한다. 대학원 정책과정, 평생교육원, 평통, 아카데미, 경찰서나 학교, 교회, 향우회 등에서도 강의 또는 공연 요청이 오곤 한다. 강의 내용은 장황하나 결론적으로 우리의 것을 아끼고 사랑하면 애국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우리나라 국민으로 태어나 시조창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요즘은 메스컴을 통해 다방면에서 접할 기회가 많으나 그래도 라이브로 시조창을 들어 보기란 여간 쉽지 않다.
나는 우리의 가락을 알리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든, 시조창이 궁금하다면 한자락 뽑아낸다. 나보다 시조창을 잘하는 분은 많겠으나 시조를 알리는 일을 한다는 것은 자기희생과 봉사, 학문이 요구되기 때문에 소명감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유명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려면 돈과 악단이 수반되지 않으면 노래하지 않는 것과 대조적으로 말이다.
◈ 정가를 사랑하는 이들과 후학을 펼치다
항간에는 정가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다. 물론 정가를 배운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우리가락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배우기에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악이 수능과목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 배우려하지도 가르치려하지도 않는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학과 정가를 알리는 일을 멈출 수 없다는게 나의 소명이자 철학이다.
나는 사단법인 대한민국가악진흥회 북부지회장을 인준 받고 임명장을 받아 놓았다. 서울북부지역에 시조창 후학과 함께 정가알림연구소를 개소하고 아름다운 우리 가락 정가를 알리는 일을 펼쳐 나가는데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 인생2막을 풍류여행으로 장식하다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감을 자량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수산하니 쉬어간들 어떠하리 !
이 詩는 우리가 많이 보고 들어왔던 영조때 시인 황진이의 詩 중 하나이다. 여기서 난 제2인생의 희망의 자락을 붙잡는다.
누구나 그렇듯이 인생1막은 가족과 회사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배우는 등 미래에 투자하는데 전력해 왔다. 세월은 우리를 위해 머물러 주지 않는다. 누구나 퇴직이라는 인생전환기를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된다. 우리는 인생1막이라는 같은 길을 걷다가 이제 인생2막이라는 각자 다른 낯선 길을 가게 된다. 여기서 인생2막을 준비한 사람과 준비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확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이 놀 때 같이 놀고, 남이 잘 때 같이 자고, 남이 쉴 때 같이 쉰다면 결고 남과 다른 자기만의 삶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나는 북부신문사 편집국장 겸 장학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신문사 문화부와 연계한 정가 발전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정가협회는 사단법인화 되어 팔도에 지회가 설립되어 있다. 1년에 한번씩은 8도에서 전국대회를 연다. 이제 나는 정가라는 봇짐 하나만 메고 팔도를 돌면서 풍류여행을 즐길 때가 된 듯 싶다.
내가 진정 좋아하는 시조창 중에 하나인
바람아 부지마라 정자나무 휘어진다
세월아 가지마라 청춘홍안이 공로로다
인생이 부득항 소년이니 그를 설워하노라
라는 시조창을 질러대며 진정 우리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말이다.
저자 : (中 山) 李 炳 元
약력 : 주요무형문화재41호 전수자
사단법인 대한민국가악진흥회 북부지회장
중산정가알림연구소 소장 (가칭)
서울시 주관 북서울 꿈의숲 전통문화한마당 강사
제27회 전국시조가사가곡경창대회 대회장
㈜북부신문사 편집국장 겸 장학회 사무총장


이병원 편집국장 leebw5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