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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 “103년 전 유관순 열사 순국을 생각하며” 서울북부보훈지청 보훈과 문휘 2023-10-04
편집국 bukbu3000@naver.com


▲ 서울북부보훈지청 보훈과 문휘

2023년 9월 28일은 추석 연휴의 시작을 알리는 날인 동시에 유관순 열사 순국 103년이 된 날이다. 극심한 고문과 구타를 겪은 순간에도 유관순 열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유명하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태어나 미국 선교사 사애리시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으로 편입학했다. 


유관순 열사가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해인 1919년,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화학당은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참가를 말렸지만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기어이 전원이 참가했다. 


일제는 3월 10일 전국 모든 학교에 강제로 휴교령을 내렸으나, 서울 탑골공원과 남대문에서 발발한 항일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한 유관순 열사는 고향인 천안으로 귀향하여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 


그 후 유관순 열사는 일제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체포된 지 1년 6개월 만에 18세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 지하 감방에서 순국하였다.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지 100여 년이 지난 2019년, 언론을 통해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재학시절 모습이 담긴 사진 2장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화역사관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화의 독립운동가들’ 특별전시회를 열고 유 열사의 이화학당 재학 당시 사진 원본 2장을 100년 만에 최초 공개한 것이었다. 추가로 공개된 사진 2장은 유관순 열사가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한 13~14세 때와 이화학당 고등과 재학 당시의 사진이었다.


또, 같은 해 정부는 유관순 열사에게 독립유공 훈장 중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수여했다. 정부는 1962년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5등급 중 3등급에 해당하는 독립장을 수여했으나, 이는 유관순 열사의 공적에 걸맞지 않게 저평가되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었다. 


상훈법상 ‘동일한 공적에 대하여는 훈장 또는 포장을 거듭 주지 않는다’는 규정에 발목 잡혀 추가 서훈이 이뤄지지 못하다가 국민청원과 국회 특별법 제정 등 다각적인 노력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매년 조금씩이나마 유관순 열사를 잊지 않고 열사의 발자취를 좇으려는 노력이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맨몸으로 저항하여 자신의 지조를 나타낸 사람으로서 목숨을 바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바로 열사이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학생의 신분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모진 고문과 압박에 저항했던 유관순 열사를 생각하면 누구라도 추모의 뜻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관순 열사 순국 103주년을 맞아 조국 독립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나아갔던 유관순 열사의 대의를 다시 한 번 떠올리고 감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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